오늘 5월 6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숨겨진 비자금의 실체에 대해 파헤쳐봅니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경제공동체의 재산 형성과정의 의혹을 파헤치고 은밀히 보관되어 왔다는 막대한 규모의 비자금의 실체에 접근해봅니다.

박근혜 최순실 비자금박정희 비자금


 

▶청와대의 땅 장사?
1979년, 서울 청계천에 있던 공구상사가 안양으로 온다는 소문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시가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에 땅을 구입했다. 하지만 공구상사가 옮겨간 곳은 안양이 아닌 시흥.

 

무려 7만평이라는 크기의 땅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소문을 철썩 같이 믿고 큰 돈을 의심 없이 내놓았던 걸까?

이 소문의 진원지는 비닐하우스가 들어선 557-1번지. 당시 530평 남짓한 이 땅을 19명에게 팔아넘긴 사람은 '아세아농산주식회사 외 1명'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준 판매자의 주소를 토지대장으로 알아 본 결과 ‘종로구 세종로 1번지’, 바로 청와대였다.

“박근혜가, 대통령 딸이 한다고 하는건데 그거 웬만한건 다 믿지 안 믿겠어요?“
- 임대 농지 관리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명예총재로 활동하던 구국여성봉사단의 명의로 매입한 안양 땅. 구국여성봉사단은 땅을 왜 샀으며, 왜 다시 처분했던 것일까.


▶대통령의 금고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로부터 불과 한 달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10.26 직후 청와대에 있던 두 개의 금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근무하던 비서실에서 나온 첫 번째 금고에서는 9억 6천만 원이 발견됐다. 이 돈은 이후 청와대를 장악한 전두환 씨가 박근혜 큰 영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에 있었고 접근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던 두 번째 금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사건 당일인 10월 26일, 대통령 집무실의 키를
큰 영애에게 줬다.“
- 故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국장이 끝난 11월 초순에 아버님 집무실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집무실 금고에는 서류와 편지, 
아버님이 개인적으로 쓰실 약간의 용돈도 있었다.“
- 前 대통령 박근혜, 89년 월간조선 인터뷰 

 


 큰 영애의 석연치 않은 해명이 있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부친을 잃은 직후라서인지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8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 불린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경제공동체로 오랫동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많은 증거들이 특검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최순실이 관리를 맡아온 그들의 재산규모는 확인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형성하게 된 시작이 박근혜 당시 큰 영애가 적절한 검증과정 없이 물려받은 부친의 유산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10.26 직후, 대통령 집무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또 다른 금고 - 스위스 비밀계좌
미 의회 도서관에는 3년에 걸쳐 작성된 청문회의 기록이 책으로 남아있다. 이 책의 이름은 <한미관계 보고서>. 150여명의 증언을 기록한 속기록과 전 세계 11개국에서 수집한 증거자료가 수록된 11권의 책이다. 책에는 그 당시 미국의 거대기업들이 한국 정부와 거래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리베이트를 제공했음을 실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뇌물을 받은 경로는 스위스 비밀계좌. 이후락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사들의 이름으로 차명계좌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차명계좌들이 박정희 소유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끝내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해외의 은행 기록은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 당시 청문회 조사관 하워드 앤더슨 

우리는 독일과 스위스를 오가며 박정희 스위스 비밀 계좌와 관련된 사실을 추적하던 중, 최순실의 재산증식 사업을 돕던 독일인이 한국 내에 자신명의의 차명계좌를 만들었고 역시 최씨를 돕던 독일 현지 측근이 스위스 은행에 계좌를 만들었다는 새로운 제보를 입수했다. 금융당국의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로 개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한국과 스위스의 두 계좌를 오가는 돈의 출처는 어디이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최씨 일가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자금의 뿌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미 592억의 뇌물을 대기업들로부터 수수한 것을 비롯해, 18가지의 혐의로 기소가 됐음에도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민원해결에 힘썼을 뿐”이라며 제기된 의혹과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이른 바 박근혜-최순실 경제공동체가 막대한 재산을 형성하고 은닉해온 방식과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계좌 의혹과 유사해 보이는 것은 과연 우연인 것일까?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른 바 박근혜-최순실 경제공동체의 재산 형성과정의 의혹을 파헤치고 은밀히 보관되어 왔다는 막대한 규모의 비자금의 실체에 접근해본다.

 

 

# 최순실, 베일에 쌓여있던 ‘현금’의 여왕? 
 어느날 서울에서 온 ‘강남 사모님’에게 자신의 땅을 판 강원도 평창군 주민 김 모 씨는 거래하던 시절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거래 대금 1억 원을 선뜻 현금으로 받은것. 그 강남 사모님은 땅을 보러 다닐 때도 부동산 업자의 차가 아닌 자신이 몰고 온 수입 SUV만 이용했고, 밥도 물도 다 자신의 차안에서만 따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비밀이 많아보였던 그 ‘강남 사모님’은 얼마 뒤 사상초유의 국정농단의 주인공으로 소개가 되는데...

   집안에선 현금 300만원이 꽂혀있는 두루마리 휴지가 돌아다니고,(가정부의 증언) 5억 원이 넘는 경주용 말을 살 때도, 4천만 원이 넘는 피부미용 비용을 지불할 때도 오직 현금으로만 결제했다는 최순실.

왜 그녀는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현금들은 다 어디에서 난 것일까요.

실제 300만원을 두루마리 휴지에 넣어본 사진

 

 

최순실의 재산은 10조원을 추정된다고 최근 언론에서 밝혔습니다.

이 언론의 근원지를 파헤쳐보니 조금은 과장되었지만, 그래도 믿을수 있을법한 정보였는데요. 

한국일보와 허핑턴포스트, 노컷뉴스에서 처음 기사화 시킨 것으로 알려진 최순실 10조원!  10조원의 맥락이 어떻게 근거는 어디있을까 살펴보겠습니다.

 

한 언론에서 최재석이라는 사람을 인터뷰하게 됩니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에게는 총 6명의 아내가 있었고요, 최순실은 다섯번째 아내 사이에서 낳은 자식, 그리고 이번 10조원 재산설의 근원지 최재석씨는 네번째 아내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쉽게말해 배다른남매지요.

최재석은 우연히 아버지의 금고를 보았고

등기부등록의 재산목록을 살펴보니 어림잡아 1000억가까이의 재산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태민의 재산으로 부동산이 총 1000억, 현금이 그것보다 많다고 했으니 대략 2000~3000억원이지 않겠냐는 추측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거절하였고,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1조원 가량 필요한데, 아직 부족하다.

과연 그분은 누굴까요?

박근혜와 최태민이 함께 있는 모습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 분...

 

결국 그렇게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최태민은

 

 

정권이 거듭 바뀌면서 재산몰수에 대한 위험과 세금추징 등에 대한 불안감에 재산을 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최재석이 사업차 중국에 간 사이..

최태민이 죽습니다.

그사이에 최재석이 없이 장례를 치르고, 협박에 의해 재산을 포기하게 됩니다.

 

 

재산은 그렇게 최순득(최순실의 언니)과 최순실 일당에게 넘어갔고

 

 

3000억이 10조원으로 된 재산은 단지 최재석의 추측에 근거한 것일뿐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이상 출처 노컷뉴스- 최재석 "순실家 10조재산 비밀은 최태민 누런수첩"

 

 

 

위의 증언만 믿고 보도한 일부 언론들은 부동산 1000억+현금 1000억이상재산이 10조원으로 불려졌다고 과장하게됐고.

 

이후 다른 언론들과 특검조사결과는 확인된 재산이 2000억이라는 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찌라시에서 또 다시 독일언론이 10조원의 페이퍼컴퍼니를 추적한다는 보도를 하게 됩니다. 홈페이지에 광고투성이인 찌라시 그자체로, 실제 해당 원본을 번역하면 8000억이라는 단어와 페이퍼컴퍼니가 전혀 나오지않습니다.

http://news.tf.co.kr/read/ptoday/1669863.htm

 

 

실제 독일언론 확인결과 5월이후 자금세탁조사에 관한 내용이 있을뿐 구체적인 액수가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결국 또 다시 TV조선에서 독일검찰의 발표를 정확히 인용하게 보도하게되는데

30억으로 정정합니다. 그냥 집 산 가격정도죠.

 제대로 팩트확인도 안한채 거짓뉴스를 펼쳐대는 우리나라 찌라시 언론들은 반성해야됩니다.

 

 

위와같이 한국 언론과 독일언론을 살펴본 결과 10조원의 실체는 없었고 최재석의 근거없는 뻥튀기된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500개에 달한다는 페이퍼 컴퍼니에 대한 내용조차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었으며 독일구글에서조차 검색이 안됐습니다.

 

하지만 1000~2000억은 충분히 있을 가능성도 높아보이는데요.

박근혜-최순실 경제공동체의 추정재산 1000~2000여억원, 그리고 숨겨놓은 은닉 재산 수조원이 정말 있는 것인지.

 

박정희가 남긴 재산은 스위스 비밀금고에 어떻게 얼마나 보관되어있는지.

SBS 그것이 알고싶다 1075회에서 추적해봅니다.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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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싶다 1074회 -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각하의 회고록 편에서는

옛 전남도청앞 전일빌딩 헬기사격 학살사건의 발포명령자가 누군지 추적해봅니다.

1그것이 알고싶다 화려한 휴가

 

 

5.18 사건 그리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튿날인 5월 18일 오전부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죽어가자 사람들은 저항하기 시작했지요.

그로부터 3일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10만의 시민들은

비무장 상태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집단 발포가 일어났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中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전 회장 증언  "불과 한 1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하고 있엇어요, 군인들하고 시민들하고 광주 시민들이 다 보는 데서 총을 쏜 거예요. 그래가지고 옆에서 툭툭 쓰러지니까 ...."

당시 수많은 시민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고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심지어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습니다.

국민이나 지켜야할 군인과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명이었고, 부상자는 5,000여명에 육박했으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고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데요.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지, 그리고 헬기 발포사격 명령자는 누구였는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추적해봅니다.

 

 

518 진압작전이 '화려한 휴가'로 불리게 된 계기는?

'화려한 휴가'는 실제 518 진압작전명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두가지로 추측컨대

1. 1985년 황석영씨가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47쪽에서

부제로 '화려한 휴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에서 시작하여 '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이 책은 광주 항쟁을 다룬 최초의 책이었으며 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 였으나  당시 전두환 세력이 여전히 집권중이라 제대로 된 연구나 검증이 불가능하여 잘못된 내용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출처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288501&plink=OLDURL

 

2. 1987년 윤재걸씨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년 윤재걸 씨가 쓰신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광주 진압에 참가한 공수부대원(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모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 책 제목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공식적인 작전명령이 '화려한 휴가'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p64~65 中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을 상대로 헬기에서 사격을?

헬기 사격 목격자 최형국씨 증언 “그날 분명히 헬기 동체 좌측에 장착된 그 기관총이 뿜어대는 것을 봤어요.”

국과수 김동환 총기안전실장  “벽면을 스쳐 맞은 거라든지 그 다음에 바닥에 있는 것들은 이것보다 같은 위치거나 높은 위치 아니면 쏠 수가 없는 탄흔이죠. 헬기에서의 사격 가능성이 굉장히 유력해지는 것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져왔고 얼마 전 광주 전일빌딩에서 기관총 사격의 탄흔까지 발견됐지만, ‘광주엔 사격이 가능한 헬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 씨와 군 당국의 주장입니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자위권 행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서도 헬기 기총소사만큼은 애써 부인하는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주장과는 다른 내용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증언했습니다...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 헬기 사격 탄흔 발견

1980년 5월 신군부의 만행

전일빌딩

2016년 9월 22일. 건물외벽에서 35개 탄흔 발견.

국과수 현장조사로 10층 내부서 150여개 발견

발사상황: 호버링(정지비행)상태에서 상하로 고도 조정하며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 사격추정.

헬기 사격 판단 근거: 당시 전일빌딩 주변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음.

10층 내부 기둥 중심으로 동일 지점 수평 및 하향각도 집중사격

헬기 기종: UH-1 500MD 등

총기: 5.56mm 또는 0.3inch 탄환 (유력)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전두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두환 씨만이 아니었습니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초유의 범죄 행위에도 경미한 처벌만 받았던 당시 군 수뇌부들이 37년 만에 털어놓은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 자체를 내가 부인해. 무엇이 민주화요 그게 폭동이지.”

“광주에 틀림없이 북괴가 습격했을 거예요. 우리가 잘 잡지 못하고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규명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헬기사격 발포사격자는 누구?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하지 않고 진압 책임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사실도 10여년전 드러난 바 있습니다.

출처: MBC 뉴스2005-05-17 , 5.18 당시 전두환, 최규하 대통령께 책임 떠넘기려[이용마]

앵커: 엄기영, 김주하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질적인 권력서열 1위 전두환..

그는 알고 있겠죠? 헬기사격 발포명령자가 누구였는지...

 

 2017년 4월 2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려한 휴가, 각하의 회고록'편에서는

 전두환씨는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무관한가. 북한특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선동했고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군인을 살상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이미 법적, 역사적 판단이 내려지고 국가에 의해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시민이 저항한 명예로운 사건으로 정의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인해봅니다.

MBC 제5공화국 518민주화운동 사건 5부작 재방송 다시보기 시청

 -1부-

 

 -2부-

 

-3부-

 

-4부-

 

-5부- (전남도청 진압작전)

저작권:MBC

 

 

▶부록: 전남도청 헬기투입은 자의적방어인가? 상부 명령인가?

 지난 2017년 2월 1일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기간 헬기사격 군기록 종합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의 80년 5월21일 조치사항(20사단 충정작전 상보)에는 ‘오전 9시 무장 헬기 긴급 건의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합참상황보고철에 “5월21일 오전 10시 506항공대 소속 (경공격형) 500MD 헬기 2대가 2군 구두지시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진압차 출발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고

'특전사령부 작전경과'에는 ‘5월21일 오후 3시 20사단 병력, 헬기로 도청 투입 실패’라는 기록 등이 존재합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기록을 토대로 “5월21일 오전부터 군은 헬기를 이용한 20사단의 전남도청 투입 작전을 준비하고, 헬기가 도착한 오후 1시10분 이후 도청 투입 작전을 실행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오후 3시까지의 도청 투입 작전이 실패한 뒤 오후 4시30분 61여단장과 대대장 3명이 ‘헬기 정찰을 통해 공중기동작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보고한 이후, 오후 4시 50분 도청에 주둔해 있던 특전사 병력이 전격적인 철수를 단행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전남도청 투입 작전 명령’으로 특전사는 사격을 하며 도청을 사수하고, 1항공여단은 무장 헬기로 도청 주변에 사격 또는 병력을 투입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광주소요사태분석 교훈집과 육군1항공여단 작전 지원 내용에 ‘헬기의 구체적 작전 임무가 무력시위 및 공중화력 지원’으로 적혀 있는 점을 들어 “명령에 의한 공중화력 지원이 헬기 사격을 함의한다”고 추론했습니다.


 특히 김 교수는 5월21일 오후 1시~3시 사이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잇따른 점, 5월21일 오후 1시 특전사의 도청 앞 집단 발포(군 최초 사격)가 있었던 점, 헬기를 이용한 도청 투입작전이 전개되기까지 특전사가 사격하며 도청을 사수할 이유가 충분했던 점, 1항공여단의 헬기(500MD 22대, 수송헬기 UH-1H 11대 등) 광주 투입이 작전일지에 기록된 점 등을 헬기 사격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또 ‘항공기의 무장 정도(5월22일 가스 1대·무장 5대)’와 ‘위력 시위 계획(5월27일)’ 기록에 따라 “헬기의 작전은 보급이나 선무 활동보다는 막강한 위력을 드러내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려는 전투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헬기 사격을 추정할 수 있는 도청 투입 작전이 적힌 군 기록은 ‘자위권적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신군부 진압 논리의 허구를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라고 전했다.

위와 같이 전남도청 헬기사건은 명령에 의한 헬기사격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위와같이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5.18 민주화운동과 5.21 전남도청 헬기 민간인학살사건을 재조명해봅니다.

제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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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 1072회 2017년 4월15일 방영분에서는 세월호 3주기를 맞아, 참사원인과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참사 3년 만에야 세월호가 인양된 이유를 조명합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국가의 자리를 대신한 이들이 있었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왔음을 돌아보고 선체인양과 함께 밝혀져야 할 진실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1그것이알고싶다 세월호 예고편


 3년만에 귀환하는 세월호인양 미스터리를 추적 세월호 인양과정의 방해자들은 누구!?

2017년 3월 23일,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둡고 긴 항해의 시간만큼 세월호는 상처투성이였지요.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는 1073일이 지나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진실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습니다. 배는 바다를 떠나 1091일 만에 뭍으로 왔지만, 세월호 참사 3년만에 선체인양과 함께 그날의 진실도 뭍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 돼지 뼈 소동, 또 다른 악몽

“거기 도착했을 때 바로 내가 먼저 뛰어올라가서 확인한 거 아니에요. 
족발 그 뼈가 딱 있어. 해수부 역시도 좀 안일하지만 
아예 무슨 뼈인지 생각도 안 한 거예요”
- 권오복/미수습자 권재근씨 형


  그것이알고싶다 제작진이 만난 미수습자 가족 권오복씨는 그날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다. 동생과 조카를 아직 찾지 못한 그는 반잠수선 선박에서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다.
해수부는 뒤늦게, 국과수 직원의 육안으로 확인해 본 결과 해당 뼈가 미수습자 유해가 아닌 돼지 뼈라고 정정했다.
제대로 확인을 거치기 전에 급하게 내린 결론을 기정사실인 양 발표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뼈 조각이 뚫린 유실방지막을 통해 뻘과 함께 배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실방지막이 제대로 설치가 됐는지, 설치 된 이후에 훼손은 없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확인은 없었다.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뻘을 포대자루에 쓸어 담거나 뻘을 밟고 다니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미수습자 9인의 온전한 수습과 진상규명이라는 인양의 애초 목적은 배가 수면위로 떠오른 이후부터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앞서 인양 과정에서 선체를 훼손시켰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하지는 않을까?





# 2차 가해, 그들은 왜 진상규명을 반대하나?

“조사기관이 조사를 하러가서, 문을 안 열어주니까 앉아서 농성하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동안 서로 교대해가면서 그러고 있는 게 참 되돌아보면 참담하죠
특히 국정원 이라든지 청와대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김성훈/ 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아니 나는 엄마예요 우리가 무슨 죄인이에요? 우리는 죄를 지은 게 아니고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 왜 정부가 구조를 안 했는지에 대해서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잖아요.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 이지성/ 故김도언 학생 어머니>


  조사를 하러 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면 참담하다는 김성훈 전 조사관.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조사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진상규명에 필요한 특조위 예산을 가지고 여당 인사들은 세금도둑이라며 활동을 하기도 전에 특조위원들을 비난했다. 가장 기본적인 구조의 책임을 방기한 현장 책임자들 조사 역시 결국 총체적 지휘를 하는 청와대로까지는 나아가지도 못했다. 왜 이렇게 진실이 밝혀지길 두려워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그 순간부터 나라에서 감시의 대상이 됐다.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을 맴도는 건 일상이 됐고, 심지어는 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러 갔을 때마저 낯선 남자의 감시를 받아야했다고 도언 어머니 지성씨는 회상했다. 참사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 이들이 왜 국가의 감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된 걸까?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당연한 요구는 지난 3년간 왜 이렇게 무리한 요구로 치부되어져 왔는가?
   

# 세월호, 그리고 사람들
 
“제가 조금만 더 거기서 침착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못한 거 때문에 아직도 그 혁규도 바로 눈앞에서 있는 걸 
그냥 다 놔두고 온 거고 일반인들, 학생들 눈이 다 .......“
<김동수/ 세월호 생존자>

  제작진은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의 목포행에 동행했다. 참사 당시 몸에 소방호스를 감아 학생들을 구했던 그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괴롭고 힘든 기억이지만 그는 꼭 인양된 세월호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사고 이후 외상 후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를 더욱 괴롭히는 건 더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구조의 책임을 다 했어야만 하는 책임자들은 그 이후 승진을 거쳐 더욱 높은 자리에 가 있는데, 목숨을 걸고 구조활동을 한 이들에겐 기본적인 치료지원조차 요구해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공우영씨는 잠수작업 도중 목숨을 잃은 동료 잠수사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었다.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죄를 묻는 이해 못할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갈 수 있겠죠. 국민인데”  
<공우영/ 민간잠수사>
 
 

방송  일자 : 2017. 4. 15. (토) 밤 11:05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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