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그것이알고싶다 1087회에서는 도주 중인 제천 토막살인사건 용의자 신명호의 행적을 추적합니다.

돈많은 주부들을 농락한 악랄한 전과 10범, 사기전과 12범 제비족 신명호의 수법과 가명 등 하루 빨리 잡히길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여러분의 많은 제보 바랍니다.

 

제천 토막살인사건

 

신명호 공개수배

 

제천 독신녀 토막살인사건의 서막

 2003년 3월 16일, 충북 제천시 청풍면의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던 인적 드문 야산 입구 골짜기에서 굴착기 기사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합니다.  다가가서 살펴보기도 전부터 본능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고...

배수로

자세히 살펴보니 김장용 비닐에 여성의 머리 부분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시선이 훼손되어 있었고 부패정도도 심했습니다.

신고를 받은 제천 경찰서의 형사들이 현장으로 출동했고 토막난 머리 외에 다른 부분들을 찾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고, 몸통과 팔, 다리 등이 연이어 발견됐습니다.

토막난 시체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일렬로 정렬됐었다고 하는데요

경찰은 당시 어렵게 지문을 복원하여 신원을 파악했는데 그녀는 4개월전부터 경기도 용인에서 실종신고된 50대 여성 구영서씨였습니다.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고, 구씨의 사망원인을 교살로 판명되었습니다. 누군가 목졸라 살해한 뒤 토막 내 시체를 유기한 것이죠.

 

 

 

용의자 특정- 전과 10범, 사기전과로 수배중이던 신명호.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구씨의 주변 인물들을 탐색하였고, 휴대전화 통화내역에서 사기전화 11범인 신명호씨를 발견합니다.

신명호는 마지막통화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2003년 당시 45세로 1959년 3월 2일생인 그는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제주도 등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사기행각을 벌여온 전문 사기범! , 피해자 구씨와는 골프동호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구씨가 실종되기 직전인 12월 초 나흘간 40여차례나 통화한 사실도 드러났으며 같은달 16일 구씨의 예금 4300여만원이 신씨의 또다른 내연녀 계좌로 이체시킨 것도 확인됐습니다.

또 신씨가 할인매장에서 흉기를 구입한 내역, 16일을 전후해 구씨의 신용카드로 홈쇼핑과 골프숍, 성형외과 등에서 750여만원을 결제, 가전제품과 현금서비스 등 1700여만원을 결제하거나 인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같은달 17일에는 구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에서 신명호가 휴대전화로 통화한 기록도 있었으며 18일에는 인근 호텔에 투숙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범행이 명백한 것이죠.

경찰은 2002년 12월 16일에 구씨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경찰의 시체 부검결과 추측한 마지막 구씨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신명호는 구씨를 감금하고 통장의 비밀번호를 추긍했고, 거짓으로 드러날 때마다 칼로 그녀의 허벅지를 그어서 사체에는 여러차례 칼에 베인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녀를 욕실에 방치한 채 토막내기 위한 도구를 사러 쇼핑까지 한 여유를 보였고, 할인매장에서 구입한 도구로 구씨를 토막내 가방에 담고, 다시 나가 세제와 수세미, 냄새제거제 등을 사가지고오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토막을 내는데 사용된 도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유력 용의자인 신명호를 집중 조사했는데요.

그는 골프동호회를 운영하면서 돈 많은 여성회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자신을 잘나가는 사업가로 사칭하며 동호회에 가입한 주부들에게 고가의 명품선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혹해 성관계를 맺고 금품을 갈취했던 악랄한 제비족이었습니다.

신씨에게 당한 피해자만 수십명으로 추정됐고 일부 가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전과 10범인 신명호는 독신녀였던 구씨가 사채업을 해서 큰 돈을 번 사실을 알아챈 뒤 계획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신명호의 살해동기

살해동기도 충분했습니다. 신씨의 제비, 사기행각을 눈치챈 피해자 구씨는 "그 동안의 사기행각을 동호회와 경찰에 폭로하겠다"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구씨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신씨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 상황.

당시 그의 사기행각들이 드러나면 모든 것이 끝장인 상황이었고, 그는 자신의 정체와 범죄행각을 숨기기 위해 구씨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신명호는 구씨가 실종된 후에 그녀의 아이디로 동호회에 접속 다른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고, 구씨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을 의심받지 않기위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기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구씨의 실종시점부터 그동안 사기행각을 벌여왔던 여자들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을 보낸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후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리지만 신씨는 도피자금을 갖고 이미 도망친 뒤였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제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해외에 있을 가능성을 높게  봤고,

성형수술을 했을 가능성 등 다양하게 추측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2007~2008년에는 베트남의 한식당 인근에서 목격됐다는 제보들이 잇따랐습니다.

 

 

 

피해자 가족에게 카드사용금액 2500여만원 청구

피해자 구씨의 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카드사의 결제금액 청구에 또 놀랍니다.

용의자 신명호가 쓴 카드 내역 2500여만원을 법적 상속인인 구씨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청구한 것. 이에 법정 소송으로 맞섰고

법원은 "사건 이후 결제된 금액은 구씨가 신씨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증거가 없고, 설령 알려줬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에서 말한 것은 회원 규약상 비밀번호 누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며 카드사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천만다행인 셈이죠.

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신명호, 살인사건에 관한 공소시효 25년이 되기 전에만 검거한다면 처벌이 가능합니다.

 

가면 뒤에 범인 - 장기미제사건

시신 발견후 도주한 신명호를 잡기만 하면 해결된 줄 알았던 제천 토막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용의자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으로 공개수배되어 있고 여러 TV프로그램에도 방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명호 명의 통화기록이나 금전 거래 등이 전무합니다.

용의자의 흔적을 찾아 SBS 그것이 알고 싶다팀이 그의 지인들을 직접 만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요 그것은 바로 그는 매번 다른 이름과 직업을 가진,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한 두명이 아닌, 신경호, 최병기, 김준수 라는 가명 등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사건이 일어나기 이미 수년전부터 타인의 이름으로 차와 핸드폰을 사용하고, 집을 계약하고 , 통장과 카드를 만들어 사용하며 수많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게 다 허위야, 가짜야. 

주민등록증, 계좌, 의료보험 카드 이런 게 다.

그리고.. 생활하는 것도 보면 신기할 정도로 아주 치밀하고”

- 당시 형사계장 정관헌 경감 인터뷰 中 

 

범죄 심리 전문가에 의하면 본인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한다면 그는 언제든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본인의 정체성이 드러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위기에 처해지면

이러한 수준의 공격성, 살인이라는 범행을

다시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이기 때문에...”

-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中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방송에 제보를 낸 뒤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비교적 최근에 범인과 똑같은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사람의 신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여전히 전혀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사진과 지문을 통해 그가 신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17년 8월 5일 그알 1087회

제천 토막살해사건 신명호를 공개수배 합니다.

신명호      신명호

성명  :  신명호

죄명  :  살인

생년월일 : 1959년 3월 2일생 (현재나이 59세)

전과  :  사기전과 등 12

본적  :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2가

주소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특징  :  신장 167~170cm, 체격 통통한 편,

          서울과 경상도 말씨.

         사진보다 실제로는 나이가 더 들어보임.

         성형수술 했을 가능성도 있음.

용의자 신명호

제보전화 : 국번없이 112

여러분의 많은 제보를 바랍니다.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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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싶다 1074회 -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각하의 회고록 편에서는

옛 전남도청앞 전일빌딩 헬기사격 학살사건의 발포명령자가 누군지 추적해봅니다.

1그것이 알고싶다 화려한 휴가

 

 

5.18 사건 그리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튿날인 5월 18일 오전부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죽어가자 사람들은 저항하기 시작했지요.

그로부터 3일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10만의 시민들은

비무장 상태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집단 발포가 일어났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中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전 회장 증언  "불과 한 1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하고 있엇어요, 군인들하고 시민들하고 광주 시민들이 다 보는 데서 총을 쏜 거예요. 그래가지고 옆에서 툭툭 쓰러지니까 ...."

당시 수많은 시민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고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심지어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습니다.

국민이나 지켜야할 군인과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명이었고, 부상자는 5,000여명에 육박했으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고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데요.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지, 그리고 헬기 발포사격 명령자는 누구였는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추적해봅니다.

 

 

518 진압작전이 '화려한 휴가'로 불리게 된 계기는?

'화려한 휴가'는 실제 518 진압작전명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두가지로 추측컨대

1. 1985년 황석영씨가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47쪽에서

부제로 '화려한 휴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에서 시작하여 '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이 책은 광주 항쟁을 다룬 최초의 책이었으며 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 였으나  당시 전두환 세력이 여전히 집권중이라 제대로 된 연구나 검증이 불가능하여 잘못된 내용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출처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288501&plink=OLDURL

 

2. 1987년 윤재걸씨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년 윤재걸 씨가 쓰신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광주 진압에 참가한 공수부대원(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모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 책 제목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공식적인 작전명령이 '화려한 휴가'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p64~65 中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을 상대로 헬기에서 사격을?

헬기 사격 목격자 최형국씨 증언 “그날 분명히 헬기 동체 좌측에 장착된 그 기관총이 뿜어대는 것을 봤어요.”

국과수 김동환 총기안전실장  “벽면을 스쳐 맞은 거라든지 그 다음에 바닥에 있는 것들은 이것보다 같은 위치거나 높은 위치 아니면 쏠 수가 없는 탄흔이죠. 헬기에서의 사격 가능성이 굉장히 유력해지는 것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져왔고 얼마 전 광주 전일빌딩에서 기관총 사격의 탄흔까지 발견됐지만, ‘광주엔 사격이 가능한 헬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 씨와 군 당국의 주장입니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자위권 행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서도 헬기 기총소사만큼은 애써 부인하는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주장과는 다른 내용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증언했습니다...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 헬기 사격 탄흔 발견

1980년 5월 신군부의 만행

전일빌딩

2016년 9월 22일. 건물외벽에서 35개 탄흔 발견.

국과수 현장조사로 10층 내부서 150여개 발견

발사상황: 호버링(정지비행)상태에서 상하로 고도 조정하며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 사격추정.

헬기 사격 판단 근거: 당시 전일빌딩 주변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음.

10층 내부 기둥 중심으로 동일 지점 수평 및 하향각도 집중사격

헬기 기종: UH-1 500MD 등

총기: 5.56mm 또는 0.3inch 탄환 (유력)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전두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두환 씨만이 아니었습니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초유의 범죄 행위에도 경미한 처벌만 받았던 당시 군 수뇌부들이 37년 만에 털어놓은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 자체를 내가 부인해. 무엇이 민주화요 그게 폭동이지.”

“광주에 틀림없이 북괴가 습격했을 거예요. 우리가 잘 잡지 못하고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규명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헬기사격 발포사격자는 누구?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하지 않고 진압 책임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사실도 10여년전 드러난 바 있습니다.

출처: MBC 뉴스2005-05-17 , 5.18 당시 전두환, 최규하 대통령께 책임 떠넘기려[이용마]

앵커: 엄기영, 김주하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질적인 권력서열 1위 전두환..

그는 알고 있겠죠? 헬기사격 발포명령자가 누구였는지...

 

 2017년 4월 2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려한 휴가, 각하의 회고록'편에서는

 전두환씨는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무관한가. 북한특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선동했고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군인을 살상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이미 법적, 역사적 판단이 내려지고 국가에 의해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시민이 저항한 명예로운 사건으로 정의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인해봅니다.

MBC 제5공화국 518민주화운동 사건 5부작 재방송 다시보기 시청

 -1부-

 

 -2부-

 

-3부-

 

-4부-

 

-5부- (전남도청 진압작전)

저작권:MBC

 

 

▶부록: 전남도청 헬기투입은 자의적방어인가? 상부 명령인가?

 지난 2017년 2월 1일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기간 헬기사격 군기록 종합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의 80년 5월21일 조치사항(20사단 충정작전 상보)에는 ‘오전 9시 무장 헬기 긴급 건의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합참상황보고철에 “5월21일 오전 10시 506항공대 소속 (경공격형) 500MD 헬기 2대가 2군 구두지시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진압차 출발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고

'특전사령부 작전경과'에는 ‘5월21일 오후 3시 20사단 병력, 헬기로 도청 투입 실패’라는 기록 등이 존재합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기록을 토대로 “5월21일 오전부터 군은 헬기를 이용한 20사단의 전남도청 투입 작전을 준비하고, 헬기가 도착한 오후 1시10분 이후 도청 투입 작전을 실행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오후 3시까지의 도청 투입 작전이 실패한 뒤 오후 4시30분 61여단장과 대대장 3명이 ‘헬기 정찰을 통해 공중기동작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보고한 이후, 오후 4시 50분 도청에 주둔해 있던 특전사 병력이 전격적인 철수를 단행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전남도청 투입 작전 명령’으로 특전사는 사격을 하며 도청을 사수하고, 1항공여단은 무장 헬기로 도청 주변에 사격 또는 병력을 투입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광주소요사태분석 교훈집과 육군1항공여단 작전 지원 내용에 ‘헬기의 구체적 작전 임무가 무력시위 및 공중화력 지원’으로 적혀 있는 점을 들어 “명령에 의한 공중화력 지원이 헬기 사격을 함의한다”고 추론했습니다.


 특히 김 교수는 5월21일 오후 1시~3시 사이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잇따른 점, 5월21일 오후 1시 특전사의 도청 앞 집단 발포(군 최초 사격)가 있었던 점, 헬기를 이용한 도청 투입작전이 전개되기까지 특전사가 사격하며 도청을 사수할 이유가 충분했던 점, 1항공여단의 헬기(500MD 22대, 수송헬기 UH-1H 11대 등) 광주 투입이 작전일지에 기록된 점 등을 헬기 사격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또 ‘항공기의 무장 정도(5월22일 가스 1대·무장 5대)’와 ‘위력 시위 계획(5월27일)’ 기록에 따라 “헬기의 작전은 보급이나 선무 활동보다는 막강한 위력을 드러내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려는 전투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헬기 사격을 추정할 수 있는 도청 투입 작전이 적힌 군 기록은 ‘자위권적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신군부 진압 논리의 허구를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라고 전했다.

위와 같이 전남도청 헬기사건은 명령에 의한 헬기사격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위와같이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5.18 민주화운동과 5.21 전남도청 헬기 민간인학살사건을 재조명해봅니다.

제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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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 1072회 2017년 4월15일 방영분에서는 세월호 3주기를 맞아, 참사원인과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참사 3년 만에야 세월호가 인양된 이유를 조명합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국가의 자리를 대신한 이들이 있었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왔음을 돌아보고 선체인양과 함께 밝혀져야 할 진실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1그것이알고싶다 세월호 예고편


 3년만에 귀환하는 세월호인양 미스터리를 추적 세월호 인양과정의 방해자들은 누구!?

2017년 3월 23일,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둡고 긴 항해의 시간만큼 세월호는 상처투성이였지요.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는 1073일이 지나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진실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습니다. 배는 바다를 떠나 1091일 만에 뭍으로 왔지만, 세월호 참사 3년만에 선체인양과 함께 그날의 진실도 뭍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 돼지 뼈 소동, 또 다른 악몽

“거기 도착했을 때 바로 내가 먼저 뛰어올라가서 확인한 거 아니에요. 
족발 그 뼈가 딱 있어. 해수부 역시도 좀 안일하지만 
아예 무슨 뼈인지 생각도 안 한 거예요”
- 권오복/미수습자 권재근씨 형


  그것이알고싶다 제작진이 만난 미수습자 가족 권오복씨는 그날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다. 동생과 조카를 아직 찾지 못한 그는 반잠수선 선박에서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다.
해수부는 뒤늦게, 국과수 직원의 육안으로 확인해 본 결과 해당 뼈가 미수습자 유해가 아닌 돼지 뼈라고 정정했다.
제대로 확인을 거치기 전에 급하게 내린 결론을 기정사실인 양 발표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뼈 조각이 뚫린 유실방지막을 통해 뻘과 함께 배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실방지막이 제대로 설치가 됐는지, 설치 된 이후에 훼손은 없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확인은 없었다.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뻘을 포대자루에 쓸어 담거나 뻘을 밟고 다니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미수습자 9인의 온전한 수습과 진상규명이라는 인양의 애초 목적은 배가 수면위로 떠오른 이후부터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앞서 인양 과정에서 선체를 훼손시켰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하지는 않을까?





# 2차 가해, 그들은 왜 진상규명을 반대하나?

“조사기관이 조사를 하러가서, 문을 안 열어주니까 앉아서 농성하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동안 서로 교대해가면서 그러고 있는 게 참 되돌아보면 참담하죠
특히 국정원 이라든지 청와대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김성훈/ 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아니 나는 엄마예요 우리가 무슨 죄인이에요? 우리는 죄를 지은 게 아니고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 왜 정부가 구조를 안 했는지에 대해서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잖아요.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 이지성/ 故김도언 학생 어머니>


  조사를 하러 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면 참담하다는 김성훈 전 조사관.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조사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진상규명에 필요한 특조위 예산을 가지고 여당 인사들은 세금도둑이라며 활동을 하기도 전에 특조위원들을 비난했다. 가장 기본적인 구조의 책임을 방기한 현장 책임자들 조사 역시 결국 총체적 지휘를 하는 청와대로까지는 나아가지도 못했다. 왜 이렇게 진실이 밝혀지길 두려워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그 순간부터 나라에서 감시의 대상이 됐다.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을 맴도는 건 일상이 됐고, 심지어는 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러 갔을 때마저 낯선 남자의 감시를 받아야했다고 도언 어머니 지성씨는 회상했다. 참사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 이들이 왜 국가의 감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된 걸까?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당연한 요구는 지난 3년간 왜 이렇게 무리한 요구로 치부되어져 왔는가?
   

# 세월호, 그리고 사람들
 
“제가 조금만 더 거기서 침착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못한 거 때문에 아직도 그 혁규도 바로 눈앞에서 있는 걸 
그냥 다 놔두고 온 거고 일반인들, 학생들 눈이 다 .......“
<김동수/ 세월호 생존자>

  제작진은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의 목포행에 동행했다. 참사 당시 몸에 소방호스를 감아 학생들을 구했던 그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괴롭고 힘든 기억이지만 그는 꼭 인양된 세월호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사고 이후 외상 후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를 더욱 괴롭히는 건 더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구조의 책임을 다 했어야만 하는 책임자들은 그 이후 승진을 거쳐 더욱 높은 자리에 가 있는데, 목숨을 걸고 구조활동을 한 이들에겐 기본적인 치료지원조차 요구해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공우영씨는 잠수작업 도중 목숨을 잃은 동료 잠수사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었다.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죄를 묻는 이해 못할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갈 수 있겠죠. 국민인데”  
<공우영/ 민간잠수사>
 
 

방송  일자 : 2017. 4. 15. (토) 밤 11:05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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