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그것이 알고싶다 1074회 -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각하의 회고록 편에서는

옛 전남도청앞 전일빌딩 헬기사격 학살사건의 발포명령자가 누군지 추적해봅니다.

1그것이 알고싶다 화려한 휴가

 

 

5.18 사건 그리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튿날인 5월 18일 오전부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죽어가자 사람들은 저항하기 시작했지요.

그로부터 3일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10만의 시민들은

비무장 상태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집단 발포가 일어났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中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전 회장 증언  "불과 한 1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하고 있엇어요, 군인들하고 시민들하고 광주 시민들이 다 보는 데서 총을 쏜 거예요. 그래가지고 옆에서 툭툭 쓰러지니까 ...."

당시 수많은 시민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고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심지어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습니다.

국민이나 지켜야할 군인과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명이었고, 부상자는 5,000여명에 육박했으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고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데요.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지, 그리고 헬기 발포사격 명령자는 누구였는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추적해봅니다.

 

 

518 진압작전이 '화려한 휴가'로 불리게 된 계기는?

'화려한 휴가'는 실제 518 진압작전명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두가지로 추측컨대

1. 1985년 황석영씨가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47쪽에서

부제로 '화려한 휴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에서 시작하여 '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이 책은 광주 항쟁을 다룬 최초의 책이었으며 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 였으나  당시 전두환 세력이 여전히 집권중이라 제대로 된 연구나 검증이 불가능하여 잘못된 내용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출처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288501&plink=OLDURL

 

2. 1987년 윤재걸씨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년 윤재걸 씨가 쓰신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광주 진압에 참가한 공수부대원(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모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 책 제목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공식적인 작전명령이 '화려한 휴가'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p64~65 中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을 상대로 헬기에서 사격을?

헬기 사격 목격자 최형국씨 증언 “그날 분명히 헬기 동체 좌측에 장착된 그 기관총이 뿜어대는 것을 봤어요.”

국과수 김동환 총기안전실장  “벽면을 스쳐 맞은 거라든지 그 다음에 바닥에 있는 것들은 이것보다 같은 위치거나 높은 위치 아니면 쏠 수가 없는 탄흔이죠. 헬기에서의 사격 가능성이 굉장히 유력해지는 것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져왔고 얼마 전 광주 전일빌딩에서 기관총 사격의 탄흔까지 발견됐지만, ‘광주엔 사격이 가능한 헬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 씨와 군 당국의 주장입니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자위권 행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서도 헬기 기총소사만큼은 애써 부인하는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주장과는 다른 내용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증언했습니다...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 헬기 사격 탄흔 발견

1980년 5월 신군부의 만행

전일빌딩

2016년 9월 22일. 건물외벽에서 35개 탄흔 발견.

국과수 현장조사로 10층 내부서 150여개 발견

발사상황: 호버링(정지비행)상태에서 상하로 고도 조정하며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 사격추정.

헬기 사격 판단 근거: 당시 전일빌딩 주변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음.

10층 내부 기둥 중심으로 동일 지점 수평 및 하향각도 집중사격

헬기 기종: UH-1 500MD 등

총기: 5.56mm 또는 0.3inch 탄환 (유력)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전두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두환 씨만이 아니었습니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초유의 범죄 행위에도 경미한 처벌만 받았던 당시 군 수뇌부들이 37년 만에 털어놓은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 자체를 내가 부인해. 무엇이 민주화요 그게 폭동이지.”

“광주에 틀림없이 북괴가 습격했을 거예요. 우리가 잘 잡지 못하고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규명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헬기사격 발포사격자는 누구?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하지 않고 진압 책임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사실도 10여년전 드러난 바 있습니다.

출처: MBC 뉴스2005-05-17 , 5.18 당시 전두환, 최규하 대통령께 책임 떠넘기려[이용마]

앵커: 엄기영, 김주하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질적인 권력서열 1위 전두환..

그는 알고 있겠죠? 헬기사격 발포명령자가 누구였는지...

 

 2017년 4월 2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려한 휴가, 각하의 회고록'편에서는

 전두환씨는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무관한가. 북한특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선동했고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군인을 살상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이미 법적, 역사적 판단이 내려지고 국가에 의해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시민이 저항한 명예로운 사건으로 정의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인해봅니다.

MBC 제5공화국 518민주화운동 사건 5부작 재방송 다시보기 시청

 -1부-

 

 -2부-

 

-3부-

 

-4부-

 

-5부- (전남도청 진압작전)

저작권:MBC

 

 

▶부록: 전남도청 헬기투입은 자의적방어인가? 상부 명령인가?

 지난 2017년 2월 1일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기간 헬기사격 군기록 종합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의 80년 5월21일 조치사항(20사단 충정작전 상보)에는 ‘오전 9시 무장 헬기 긴급 건의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합참상황보고철에 “5월21일 오전 10시 506항공대 소속 (경공격형) 500MD 헬기 2대가 2군 구두지시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진압차 출발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고

'특전사령부 작전경과'에는 ‘5월21일 오후 3시 20사단 병력, 헬기로 도청 투입 실패’라는 기록 등이 존재합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기록을 토대로 “5월21일 오전부터 군은 헬기를 이용한 20사단의 전남도청 투입 작전을 준비하고, 헬기가 도착한 오후 1시10분 이후 도청 투입 작전을 실행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오후 3시까지의 도청 투입 작전이 실패한 뒤 오후 4시30분 61여단장과 대대장 3명이 ‘헬기 정찰을 통해 공중기동작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보고한 이후, 오후 4시 50분 도청에 주둔해 있던 특전사 병력이 전격적인 철수를 단행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전남도청 투입 작전 명령’으로 특전사는 사격을 하며 도청을 사수하고, 1항공여단은 무장 헬기로 도청 주변에 사격 또는 병력을 투입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광주소요사태분석 교훈집과 육군1항공여단 작전 지원 내용에 ‘헬기의 구체적 작전 임무가 무력시위 및 공중화력 지원’으로 적혀 있는 점을 들어 “명령에 의한 공중화력 지원이 헬기 사격을 함의한다”고 추론했습니다.


 특히 김 교수는 5월21일 오후 1시~3시 사이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잇따른 점, 5월21일 오후 1시 특전사의 도청 앞 집단 발포(군 최초 사격)가 있었던 점, 헬기를 이용한 도청 투입작전이 전개되기까지 특전사가 사격하며 도청을 사수할 이유가 충분했던 점, 1항공여단의 헬기(500MD 22대, 수송헬기 UH-1H 11대 등) 광주 투입이 작전일지에 기록된 점 등을 헬기 사격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또 ‘항공기의 무장 정도(5월22일 가스 1대·무장 5대)’와 ‘위력 시위 계획(5월27일)’ 기록에 따라 “헬기의 작전은 보급이나 선무 활동보다는 막강한 위력을 드러내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려는 전투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헬기 사격을 추정할 수 있는 도청 투입 작전이 적힌 군 기록은 ‘자위권적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신군부 진압 논리의 허구를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라고 전했다.

위와 같이 전남도청 헬기사건은 명령에 의한 헬기사격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위와같이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5.18 민주화운동과 5.21 전남도청 헬기 민간인학살사건을 재조명해봅니다.

제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새빌로의마법사
,